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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대회 공연극본 1.도깨비마당 (1985,제1회 한국여성대회) 본문

역대 한국여성대회(제1-35회)/제1회~10회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대회 공연극본 1.도깨비마당 (1985,제1회 한국여성대회)

3.8 여성의날 여성연합 2011. 2. 20. 01:43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공연 극본
1. ‘들꽃은 쓰러지지 않는다’ ( 제1회 한국여성대회, 1985 )



| 사례극 / 도깨비마당


                                                       들꽃은 쓰러지지 않는다


도깨비 : 흥, 흥! (냄새 맡는 흉내를 낸다. 관객 사이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냄새를 맡다가)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흥, 흥, 이게 무슨 냄새냐? (머리를 갸우뚱거리다가 무릎을 치며) 오라, 알겠다. 농투성이 여편네들 일하느라고 몸뚱아리가 푹푹 썩어지는 냄새로구나. 설거지통에서 나는 김치국 냄새, 빨래통에서 나는 왼갖 꼬랑내, 논갈아 밭갈아 땀냄새, 돼지 키우느라 돼지똥 냄새. 아, 남편 밑 대주랴 자식새끼 젖 멕이랴. 시에미 똥 받으랴, 시누년 눈치보랴, 어디 그 뿐인가. 농협에서 외상 비료값 독촉장 받고 눈물 콧물 쏟으며 인간적, 본질적, 근본적, 근원적 고통에 쩔어 나는 냄새. 게다가 수입 육우까지 썩어 자빠라지니 웩 메스껍다, 메스꺼워. 그 화려한 근대화인지 산업화인지 되기 전에는 가방 끈 짧은 촌년들 상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저곡가 정책을 시행하고부터는 요땅이 내 땅이더라. 하하하. 뼈골 빠지게 땅 파서 번 돈은 비료값으로 꿀꺽, 돼지 새끼똥 치우며 키워 번 돈은 사료값으로 꿀꺽. 모조리 긁어다가 꿀꺽, 꾸울꺽. 다 삼키며 에헴. 농협빚, 농협빚만 한무더기 챙겨다가 안겨주었지.

(‘산타루치아’ 곡에 가사바꾸어 노래한다)

창고에 쌓인 쌀, 누구의 쌀이냐. 니 배는 고프냐 내 배는 부르다. 쌀 털러 가자 쌀 털러 가자.

음음, 그런데 이 무식한 촌년들, 땅팔아 집팔아 집도 절도 없이 마구마구 도시로 가더니만 내 그런 년들 죄 잡아다가 몽땅 도시 빈민 만들고, 대책 없이 내쫓아 철거민 만들고, 댕댕거리며 대드는 년들! 다 잡아다가 구속시켰지. 그랬더니 내 얼굴이 이렇게 번드르르... (모종의 행동) 대가리, 좀 굴린다고 고소득 특용작물 재배합네 하다가 몽땅 들어먹구서 땅바닥이 웬수라고 땅바닥만 탕탕 두들기며 우는 년들, 그 모든 것이 다 요 머리님 대갈님 덕분 아니것어? 그뿐이냐. 내가 또 공순이년들 부려먹으려고 공업화를 무진장 무조건 무작정 무질서 무차별로 강행시켰더니 못난년들 모두 다 내 꾐에 빠져들더라 이거야, 아 공순이들이야말로 진정 내 구미에 당기는, 근대화의 기수, 조국과 민족의 위대한 산업역군 아니겠어? 고년들 뼈 갈아서 외자도입 합작투자, 으하하하. 하지만 공순이 부려서 내 배만 채웠느냐? 그게 아니다. 그러면, 누굴 위해 썼느냐? 머리 노랗고 코 크신 어르신네, 이 몸을 어여삐 여겨 주시니 이 몸이 또한 신나고 신나고 계속 신난다. (한바탕 논다)

야, 너 인물이 잘났어, 가문이 좋아? 학벌이 높아? 그렇다고 남편감 잘 물 껀수라도 있어 응? 너 왜 사니? 뭐? 여성해방? 떽! 훼방놓는 소리하고 있네. 너같이 좀 배웠다 하는 년들 꼴갑 떠는 거 얼마나 눈꼴신 줄 알아? 우아한 척, 고상한 척, 섹시한 척. 야, 이년아 니 남편하고 이불속에서나 남녀 평등해라. 너같은 년이 나한테 시집올까봐 겁난다. 이 쌍년아! 지 애비 에미 등골 빠지게 일해서 비싼 등록금 내주니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민주화 운동한다고 설치고 다니는 년들 모조리 잡아다가 전투경찰 시켜서 빨가벗겨 목욕시키고, 평생동안 얼굴도 못들고 다니게 만들어야 한다구.

야! 너 이리 나와봐. (한 명을 불러낸다) 니가 민주화가 좋다고 했냐?

앉아, 가랭이 벌리고 앉아. (불려나온 사람, 시키는 대로 한다) 뒤로 누워, 가랭이 들고 너 술쳐먹고 담배 피면서 부르는 노래 불러봐, 다리로 박자 맞추면서 그거, ‘삼천만’ 불러봐, 빨랑! (다리를 걷어찬다. 노래하지 않자) 이렇게 배운 년들일수록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구. 이게 바로 지식인의 속성입니다. 야, 이년봐라. 오늘같은 날은 날 좀 골라서 나와야 할 거 아야 저년 생리중이야, 어휴 냄새, 저리 꺼져라. 이년아, 니가 안 부르면 내가 부른다.

(‘농민가’를 부르고 퇴장. 사례극으로 이어짐)



(회사측 2명, 노동자 2명 등장, 회사측은 계속 역할바꾸기 식으로 진행할 수 있다)

사장 : 생산과장! 목표량 달성! 

과장 : 김주임!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 점심시간 30분 단축, 퇴근시간 30분 연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량 달성! (사장이 김주임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듣는다)

주임 : 만성 위장병은 게브랄티로, 관절염은 ‘맞다 게보린’ 내지는 아스피린으로, 무좀 따위는 간편하게 아끼장끼로 때우고, 설사 오줌보가 부풀어서 풍선이 된다고나 할까, 마, 굳이 표현하자면 에드벌룬이 되어 승천한다고나 할까. 죽어도 동요됨이 없이 강인하고 꿋꿋하게 목표량 달성이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반장 : 목표량 달성!

노동자1 : 아니, 그 목표량이 도대체 어떻게 산출된 거예요?

노동자2 : 말도 안돼요.

주임 : (과장에게) 말이 안된다는데요. 골때린답니다.

과장 : (사장에게) 벨이 꼴린다는데요. 눈깔나온답니다.

사장 : 야, 너 지금 누구한테 월급받냐? 사장한테 월급받는거냐? 노조한테 월급받는거냐?

과장 : 그 공순이들 돌대가리보다 더 안돌아가는 대가리는 무슨 대가리과에 속하는거냐? 그것도 대가리라고 할 수 있는거냐?

주임 : 대가리도 대가리 나름이지요. (노래가사를 바꾸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부른다) 어느날 텅빈 내 머리를 붙잡고 내 머리의 허전함을 느꼈죠.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빠져버린 것이 아닐까. 빠져버린 내머리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머리없이 살았군요. 난 참 머리없이 살았군요. 난 참 머리없이 살았군요. 우우우 우우우 쪽팔려.

사장 : 초재기 실시하라구.

과장 : 초재기 실시!

주임 : 초재기 실시!

(노동자들 기계춤을 추려할 때, 주임, 이들을 약 올리듯)

주임 : 시-이작! 요-이땅! 레-디고, 원투쓰리 포, 쓰리 투 원 제로!

(주임, 초시계를 들고 ‘째깍째깍’ 소리내며 시간을 재고, 노동자들은 정신없이 앞뒤로 돌아다니며 기계춤을 춘다)주임 : 스톱! 자, 봐라, (만족한 듯) 60초에 이렇게 뽑았잖니. 그럼, 하루에 몇 장 뽑나볼까? 60×60×60×12는? (노동자 얼굴을 컴퓨터 누르듯이 꼭꼭 눌러대다가) 뿅, 자증거가 이렇게 있잖아?

노동자1 : 우리가 로보트예요? 헉헉!

노동자2 : 우리가 기계예요? 기계예요?

주임 : 야, 시끄러워. 기계는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대답이나 잘 해주지 기계만도 못한 년들이.

노1.2 : 아니 뭐라구요?

(노동자들 험악한 눈빛에 주임 멈칫하고 있고, 사장이 나온다)

사장 : 이것 봐. 그러니까 연말 보나스 지금 한다잖아. 조금만 참고 일들 하자구. 응?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목표량 달성하는 겁니다. 자, 자.

노1 : 보너스도 좋지만 기계처럼 일만 해야 한다니... 노동자로 태어난 게 너무 서러워.

노2 : 그럼 어떡하니? 연탄도 들여놔야되구. 설날에 빈손으로 고향갈거야? 할 수 없어. 사장이 약속했으니까 이번 한 번만 꾹 참고 하라는 대로 해보자.

(노동자들 일하고 있을 때, 한 쪽에서 쑥덕거리고 있다가 주임이 나와서 월급을 준다)

주임 : 자, 월급이에요. 

(노동자들 월급봉투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노1 :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보나스가 없잖아?

노2 : 어머, 너도 없니?

노1 : 얘, 속았어. 우리가 또 속은거야.

노2 : 보나스를 준다고 우리를 기계처럼 부려먹더니, 이건 말도 안돼.

노1 : 안돼겠어.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우리가 한두 번 당하는 거야?

노2 : 맞아, 단단히 따져야 해.

(노동자들 몹시 화가 나고 흥분해서 회사측으로 따지러 간다. 이때 회사측 간부가 나와서 선을 긋고, 선 안으로 못 넘어오게 막는다. 잠깐 동안 실랑이를 벌인 뒤)

노1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연말 보나스가 없잖아요?

사장 : 살살 말해라. 귀 안 먹었다. 회사 사정이 안 돌아가는 걸 낸들 어떡하냐?

노2 : 뭐라구요? 저희들 연말 보나스, 언제 주실 거예요?

노1 :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해주세요. 언제 주실 건지 약속을 하시라구요.

사장 : 그래, 경기가 회복이 되야지, 불경기가 돼서 말이야.

노1 : 불경기, 불경기! 재작년에도 불경기, 작년에도 불경기, 올해도 불경기, 내년에도 불경기겠네요? 아니, 그렇게 맨날 불경기인데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나요?

노2 : 그리구, 사장님. 불경기인 줄 빤히 알면서 보나스 준다고 거짓말 하셨단 말이에요?

: 햐! 노조가 애들 다 버리네. 니네 노조가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냐? 어디 에비같은 사람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달려드냐, 달려들길.

노1 : 사장님, 여긴 공석이니까 반말하지 마시고 말씀 좀 삼가해 주세요.

노2 : 저희가 사장님 딸이에요? 사장님한테 용돈받으러 온줄 아세요? 우리가 거지에요? 일한 대가를 달란 말이에요.


(노동자들 대들자, 사장, 안절부절하다가 시침을 떼며)

사장 : 너희들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노사협의란 말을 모르는가 본데, 내가 설명을 해주지. 노사협의란 말야. 너희같은 노동자하고 사장님같은 사용자하고 회사 사정을 요모조모 따져서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저희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자는 거야. 그러면 너희 살고 나도 사는 길이 무엇이냐? 회사가 잘 사는 길이지, 응?

(사장은 혼자서 횡설수설 떠들고 있고, 노동자들은 서로 귀엣말을 나누고 있다. 이 때 주임이 뛰어들어와서)

주임 :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생산량이 1/3으로 떨어져서 올라갈 생각을 안 하는데요.

(사장, 혼자서 떠들다가 벌컥 화를 내고, 노동자들 후다닥 나간다)

사장 : 뭐야? 생산량이 1/3으로 떨어져?

주임 : 예. 1/3.

사장 : 아니, 그럼 노조에서 태업을 시켰단 말이지?

 주 : 아니, 그게 아니구요. 노조에서 태업시킨 게 아니라 연말 보나스를 준다고 그랬다가 안 주니까 이것들이 자포자기를 한 것 같습니다.

사장 : 좌우지간 장수는 뽑아야 할테니까 일단 보나스 30%만 지급하라구. 내 이년들을 그냥. (중얼거린다)

주임 : 자, 여러분 연말 보나스 30% 지급한다.

(연말 보나스 30% 지급한 다음, 노조원 두 명을 끌어다가 협박한다)

회사간부1 : 눈깔 곱게 떠!

회사간부2 : 야, 이 싸가지없는 년들아, 거기 앉아.

(노동자들 질질 끌려와서 찬 바닥에 꿇어앉혀진다)

간부1 : 야, 나야 대학나왔겠다 여길 그만두어도 ‘어서 오십시오’하는 데가 쌔고 쌨지만 너희야 이거 (미싱밟는 시늉한다) 밖에 더 해봤냐?

간부2 : 너, 그렇게 방방 뜨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로 끌려간다. 여자가 ××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치명적이에요. 애도 못낳는다더라. 야, 그러면 시집이나 갈 수 있을 줄 아냐? 그런다가 자살한 애도 있다더라. 그러니까 내가 인간적으로 얘기할 때 내 말 들으라구.

간부2 : 좋은 말로 할 때 탈퇴하라구. 노조가 평생 가냐?

간부2 : 호적에 빨간 줄 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 거라구.

(간부 두명이 노동자를 앉혀놓고 노조탈퇴를 강요하면서 회유, 협박한다)

간부1 : 자, 이해하겠지? 내가 탈퇴서를 이렇게 다 작성해 왔으니까 너는 도장만 ‘쾅’찍으면 된다구. 어때? 한번 읽어볼까?

간부2 : 이 문구를 작성하느라고 우리가 밤을 새웠어요. 고맙지? 눈 딱감고 찍는 거야.

간부1 : 한번 굳게 맘먹으면 뭐 못 찍을 거 있냐, 응? 자, 들어보라구.

간부1.2 : 노조없는 태장 메리야스, 회사발전, 나라 발전!

간부1 : 어때? 근사하잖아?

간부2 : 자 찍어.

(간부 1,2, 노동자에게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려고 하나 노동자들 완강히 거부한다)

노1 : 찍을 수 없어요.

노2 : 우리가 무얼 잘못했나요, 저희는 기계가 아니에요. 인간이에요.

노1 : 노동조합을 탈퇴하라는 건 말도 안돼요. 우리더러 죽으란 말인가요?

(노동자들 강력히 항의한다)

간부1 : 아니, 이년들이 정신나갔나? 맛을 좀 봐야 정신차리겠어?

간부2 : 여러 말 할 것 없이 말 안 듣는 년은 무조건 해고닷!

(간부들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노동자를 끌어낸다. 노동자들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간부들은 구타를 한다. 매 맞고 실신한 노동자들을 발로 밟고 간부들 나간다. 쓰러져있던 노동자들 ‘선봉에 서서’ 노래를 천천히 부르며 일어선다. 판을 돌며 노래하고 난 뒤 취직을 하러 돌아다닌다)

노1 : 저, 모집공고 보고 왔는데요.

회사측1 : 이름은?

노1 : 김덕순...

회사측1 : 아니, 너 태장노조 아니야? 야, 너 여기까지 물들일까 겁난다. 썩 나가!

노2 : 저, 일자리 구하러 왔는데요.

회사측2 : 전에 어느 회사에서 일했지?

노2 : 태장 메리야스요.

회사측2 : 그런데 왜 쫓겨났지? 오라! 너 블랙리스트로구나. 누구 망하는 꼴 볼려구 그래? 필요없어. 다른 데나 가보시지.

회사측1 : 아니, 너 노동부에서 블랙리스트 명단 내려온 거 몰라?

회사측2 : 너를 쓰면 우리 회사 원단 공급이 끊긴다. 내 모가지도 언제 날라갈 지 모른다구!

회사측1.2 : 나가! 꺼져! 나가라니까! 필요없다니까!

회사측1.2 : 블랙리스트 사절!

(노동자 1,2 서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점점 지쳐간다)

노1 : 예전엔 미싱소리가 지긋지긋하게 들리더니만 이제는 미싱소리가 노랫소리보다 더 그립게 들려.

노2 : 미싱에서 일하고 싶어.

(노 1,2 잠시 헤매다가 위장취업을 한다. 판 중앙에서 기계춤을 추고 있다)

회사측1 : 아니, 이년들이 20일 동안이나 나를 속이고서 일했잖아? 이런 파렴치한 년들.

회사측2 : 야! 너 누구 죽는 꼴 보려구 이력서를 허위기재해?

회사측2 : 이력서를 허위기재하면 콩밥행이야, 콩밥행!

회사측2 : 당장, 나가.

회사측1 : 해고다, 해고.

(노동자들 다시 쫓겨난다)

노1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운 것 없고 힘없는 노동자가 되었다지만 정직하게 일할 권리마저 없답니까?

노2 : 우린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빼앗으면 빼앗기고... 이제는 블랙리스트라는 명단까지 만들어서 이렇게 괴물처럼 우릴 쫓아다니다니.

노1 :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노2 : 억울해. 너무 억울해. 이제 우린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노동자들 절규하며 운다. 지쳐 쓰러져서 ‘이 세계 절반은 나’를 부르는 동안 노동자의 남동생이 누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다)

편지 : 누나, 그동안 잘 있었어? 누나가 지난번에 보내준 연말 보나스 가지고 등록금도 내고 교과서도 사고 운동화도 샀다. 엄마는 누난 사진을 꺼내놓고 얼마나 칭찬하시는지 몰라. 맏딸은 살림밑천이래. 우리 옆집에 영철이 누나 있잖아. 서울가서 대학다니는 누나 말이야. 걔네 누나보다 우리누나가 난 훨씬 자랑스러워. 누나, 고생스럽지? 고생스러워도 조금만 참아. 우리가 정직하고 바르게만 살면 언젠가는 꼭 잘 살 날이 있을 거야. 누나 내가 공부마치면 아주 행복하게 해줄게. 누나 용기를 내서 조금만 참어. 요새 감기 지독한 거 알지? 감기 조심하고 특히 연탄가스 조심해 누나. 그럼 이만 줄일게. 근사한 우리 누나에게. 동생 철이가.

(회사측과 경찰이 나온다. 큰소리로 웃으며)

회사,경찰 : 하하하, 우리는 블랙리스트 잡는 삼위일체! (손바닥을 서로 마주 친다) 하하하, 오늘은 2위일체군요, 네. 

회사측 : 저번에 태장노조에서 해고당한 년들이 부당노동행위를 고발한다, 관계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러면서 두서없이 지랄발광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노동부가 이 자리에 못나오셨군요.

: 하하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배후에는 막강한 노동부가 저렇게 떡 버티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설쳐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사측 : 물론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배후, 노동부가 있기에 블랙리스트가 있고.

경찰 : 블랙리스트가 있기에 선전경찰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해고당한 년들이 툭하면 관사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한다고 지랄을 하는데 우리(부드러운 어조로) 선전 경찰에서는 항상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느끼며, 휴대용 컵라면을 가지고 다니며 단식하는 아이들 앞에서 호르륵 얌얌 호르륵 얌얌 먹으면서 식욕을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네.

회사측 : 역시 선전경찰답군요. 휴대용 컵라면이라.

경찰 : 지들이 배고프면 달려들어 먹겠지요? 하하하.

회사측 : 이년들이 우리를 약간 야유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빨리 우리의 헌장을 외칩시다.

회사,경찰 : 블랙리스트 헌장! (선서하듯 손을 올린다)

하나, 우리는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블랙리스트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둘, 이땅의 블랙리스트를 철저하게 뿌리뽑을 때까지 불철주야 노력한다.

셋, 숭공 통일 조국의 영광된 앞날을 위하여 빨갱이보다 더 잔악한 검은 무리, 블랙리스트를 초전 박살내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이올시다.

자, 박수!

(회사측과 경찰, 블랙리스트 헌장을 낭송하고 만족해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온다)

사장 : 모시모시, 하이. 아세아스소니데쓰. 하이! 불순분자? 간첩말입니까? 빨갱이노가 우리 아세아 스소니에 잠입했습니까? 블랙리스또데스까? 하! 하이, 하이, 쏘오데쓰!

(사장, 전화에 대고 굽실거린 뒤 전화를 끊고 노동자에게 다가간다)

사장 : 야, 니가 김덕순이노지? 너, 불순단체에 가입했지?

김덕순 : 불순단체가 아니라 지오쎄예요.

사장 : 불순단체에서 당장 탈퇴하지 않으면 해고닷!

김덕순 :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자유가 있는 거고 아무리 사장님이 돈을 주고 일을 시킨다지만 이렇게 아무나 해고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사장 : 뭐야? 와, 눈깔나온다데쓰.

노동자 : 노동력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며 노예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개 돼지같은 짐승도 아니라구요. 노동자의 주체성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동료들과 힘을 합했다고 해서 아예 생존권까지 박탈해버리고 이렇게 내몰다니 우리가 전염병 환자입니까? 저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제가 여길 나가면 파출부를 하든 뭐를 하든 제 한 목숨이야 먹고 살겠지만 여기에 있는 노동자들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가지 않겠어요. 끝까지 일할 거예요.

사장 : 뭐야?

(사장의 지시에 따라 회사측 남자 사원이 달려들어 김덕순을 끌어내려고 한다. 완강하게 버티는 노동자들에게 심한 욕설과 구타를 한다. 그래도 악착같이 일을 하자 사장과 회사측 간부들은 고민에 빠진다. 사장,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며 노동자들을 째려본다. 사장이 과장에게, 과장이 주임에게, 주임이 깡패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 깡패는 다시 지명수배자인 후배 청년을 시켜서 김덕순을 강간하도록 지시한다)

깡패 : 자, 100만원이다. (돈을 건네주며) 실수없이 처리하도록.

청년 : 하지만 어떻게 그런 짓을......

청년 : 그럼 이번 한 번만 하면 다시는 저를 괴롭히지 않는 거죠?

깡패 :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일 끝나고 좀더 생각해줄테니 잘 알아서 하라구.

(깡패, 멀리서 김덕순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준다. 청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노동자들, 일을 끝내고 누워서 자고 있다. 청년, 손에 칼을 쥐고 두리번거리며 살금살금다가가다가 누워있는 노동자 한 명의 다리를 밟는다. 놀라서 깨어난 노동자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칼로 위협한다)

노동자1 : 누, 누구예요? 당신, 누구예요?

청년 : 시끄러! 큰 소리내면 죽인다.

(노동자들 서로 붙잡고 앉았다가, 침착을 되찾으며)

노동자1 : 누가 당신을 보냈는지 우린 다 알아요.

청년 : (당황하며)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노2 : 그래 여긴 어떻게 왔죠?

청년 : (칼을 들이대며) 조용히 안해? 안 그러면 죽여 버릴거야.

노1 : 우린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노2 : 그래요. 개죽음을 당하기는 싫어요. 당신... 우리 회사 사장이 시켰지요?

노1 : 죽이라고 하던가요?

청년 :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노2 : 그럼 강간하러 왔어요?

청년 : 음...음... 일종의 강간...

노1 : 당신 도대체 몇 살이에요?

청년 : 스물 두 살...

노2 :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왜 이런 짓을 하려구 하지?

청년 : 나는 형집행정지중이에요. 신분증도 없는 데다 쫓기는 몸이에요. 선배하고 약속을 했어요. 남자는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요.

노1 : 무슨 죄로 우리를 해치라고 하던가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울먹인다).

노2 : 당신도 보다시피 우린 가난한 노동자일 뿐이에요. 저번에도 공장에 들어갔다가 노동조합원이라고 해서 회사에서 쫓겨나고 이번에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아무데도 취직을 못하게 하더니, 이젠 이런 짓을 다...

노1 : 당신도 생각을 해 봐.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잖아. 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지만 일본놈 사장이 시켰다고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

(청년, 고개를 떨구고 칼을 내려놓는다. 노동자들의 얘기를 다 듣고는 일어서서그냥 나가려고 한다. 김덕순 청년을 뒤쫓아 나가며)

김덕순 : 잠깐만, 당신 집이 어디야?

청년 : 저쪽이에요. 저 여관에서 친구하고 선배하고 절 기다리고 있어요.

김덕순 :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없겠어?

청년 : 나는 형집행정지중이에요. 저 사람들 말을 안 듣게 되면...

(갑자기 태도를 바꿔 김덕순에게 달려들어서 팔을 꽉 잡는다)

청년 : 누님 안 되겠어요. 나를 봐주는 셈치고 한번만, 누님.

(김덕순을 강간하려고 한다)

김덕순 : 왜 이래. 이거 놔, 안돼. 그냥 가서 했다고 하면 되잖아.

(김덕순, 청년을 뿌리친다. 청년, 한 걸음 물러갔다가 다시 달려든다)

김덕순 : 좋아, 하지만 여기서는 할 수 없어. 저기 여관으로 가.

(청년과 함께 여관으로 가다가 도망쳐 나온다. 다음날 외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측 간부가 와서 이리저리 살피며 피식피식 웃는다)

간부 : 이봐, 지난밤에 어디서 잤지? 이 더운 여름날 웬 긴팔이야?

김덕순 : 남이야 긴팔을 입든 짧은 팔을 입든 무슨 상관이에요?

간부 : 목에 웬 상처지? 정말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은 게로군.

김덕순 : ...... .

간부 : 참 내, 처녀가 말이야... 너도 시집가긴 다 글렀다.

(간부, 빈정대며 퇴장하고 김덕순 관객을 향해)

김덕순 : 전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했지만 소위 배웠다 하는 높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고상한 척 법과 질서를 수호한다고 했는데, 피땀 흘려 일하고도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이제 여자라는 약점 때문에 강간 위협마저 받게 되다니 이게 대체 어찌 정의 구현 사회입니까? 신성한 노동의 권리를 휴지조각처럼 찢어버리고 노동자를 무참히 짓밟는 것이 바로 민주사회인가요? 여기 강간범이 쓴 회개의 편지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손가락질하는 흉악범조차도 고개를 돌리는 이런 살인적인 만행을 뒤에서 사주하고 조작하는 놈들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들이 인간입니까?

(김덕순의 절규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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